나의 삶 첫 서울 직장을 가지게 된 이야기

술술 적어보는 2025년 첫 회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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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며

2021년부터 블로그를 운영해 오면서 참 많은 글을 썼습니다. 그중에서도 회고글이 많았던 것 같네요.

돌이켜보면, 그토록 원하던 목표를 이루게 되어 기쁘기도 했지만 정말 정신없고, 생각이 많았던 시간들이었습니다. 형이상학적인 말은 이쯤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과거의 이야기

현재의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졸업을 하기까지의 저의 이야기를 잠깐 해보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참으로 큰 동경

저에게 ‘서울’ 이라는 도시는, 단순히 대도시 이상으로 느껴졌었습니다. 그때의 생각으로는, 대학이고 뭐고간에, 빨리 서울에 가고 싶다는 그런 생각도 했었고, 저를 달래주기 위해서 가깝게 지냈던 선배분이 ‘너의 실력으로도 강남 테헤란로 스타트업 갈 수 있으니, 휴학하고 시도해봐라’ 라는 것이 저에게 결의를 심어주는 말이었으니, 정말로 많은 의미를 차지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부스트캠프 기간을 통해서 서울에 몇번 더 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멤버십 입과 이전에, 학번이 약간 차이 났지만, 인스타를 통해서 저와 종종 연락해주시는 선배님 덕분에 무려 5명의 멋진 회사에서 멋진 일을 하고 계시는 선배님들과 강남의 고급 중식당에서 식사도 할 수 있었고,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삼성동의 마천루들을 거닐며, 카페에서 여러 응원 등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부스트컨퍼런스 라는 기회를 통해서, 너무나도 선망했던 판교의 고층 IT회사의 빌딩에 단순히 들어가 본 것을 넘어서, 컨퍼런스 연사가 되어보는 의미있는 경험도 할 수 있었습니다. 소문으로만 무성히 들었던 무인 로봇들이 돌아다니는 회사의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도 얻을 수 있었지요.

저에게 서울은 목표, 이상 그 자체였습니다. 그 이후에도 대구에서 학교를 다녔기에 거리가 꽤 되는 서울행 기차를 계속 타면서 학생 해커톤에 계속 모습을 비추기도 했었던 이유이기도 했지요.

‘일’ 그리고 ‘회사’에 대한 동경

저는 ‘회사’에서 ‘일’을 한다는 사람들을 참으로 부러워 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별로 피부에도 와닫지 않는 그런것보다, 무언가를 개발 한다는것이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그래서인지 주변에서 개발과 관련된 해커톤이나 학생 스타트업 단기 근무 같은것에 참 적극적이었지 싶습니다. 1년간의 학부연구생을 하겠다고 결정한 결정적인 계기도, ‘연구’가 아니고 ‘개발’위주의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결정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3~4학년의 마냥 쉽지 않은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나는 연구실에서 의미 있는 개발을 하는 의미 있는 사람이다’ 일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연구실은 저에게 ‘회사’의 체험판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비교적 최근의 이야기

인턴 그리고 연장근무

살면서 처음으로 근로계약서 라는 물건의 계약 당사자가 되어보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학교 졸업을 위해서는 현장실습이 반드시 필수적이었고, 이런저런 시도 끝에, 살고 있던 학교 기숙사에서 버스로 40~50분 걸리는 수성구의 한 SI 기업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제가 생각했던 환상을 열심히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유능한 개발자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저는 ‘기술 발표’라는 것을 ‘회사’에서 하는것이 정말 큰 소원이었습니다. 3년전 부스트캠프를 할 때를 생각해 봐도, ‘발표’라는 자리를 위해서 부스트컨퍼런스 연사로 지원을 했던 것을 보면 꽤나 일관성 있는 바람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회사’에서 ‘경영진’ 앞에서 ‘기술발표’를 진행하여, ‘원하는 기술’ 이었던 RN으로 개발을 시작 할 수 있었다 라는것은 저에게 정말로 고무적인 일이었습니다. Flutter가 기존 시스템으로 있었거든요. 이게 아니라 새로운걸 해봐라 하고 저의 제안에 긍정적인 답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뿌듯한 성과였지만, 그 회사의 한계점이 꽤나 문제였습니다. 분명 기획 문서라는것이 처음에 있는 것 같지만, 질문을 할 때마다 확실하지 않다 라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복사-붙여넣기의 연속이라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임금 밀리는게 당연하게 생각된다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졸업을 할 때까지, 학교 기숙사에 살 수 있어서, 주거비가 적을 때 동안만 다니게 되었고, 이렇게 저의 인생 첫 근로계약서에 의한 계약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처음 해본 취준. 그거 어떻게 하는건데

학교 산학연계로 들어가게 되었던 인턴이었던지라, 사실 딱히 본격적인 준비를 제대로 못했던 것 같습니다. 회사 문을 나오고 본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다들 그렇게 중요하다는 ‘실제로 배포되고 가치를 제공한 서비스’도 연구실에서 Online Judge 만들면서 해봤고, 실제 실무 경험도 인턴과 연장근무를 통해서 했는데, 이런 우수한 인재가 금방 뽑히지 않을까 하고 의기양양 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저 애송이었고, 제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는 참 많은 리비전을 거쳤습니다. 처음의 그 장황한 노션 무언가에서 미니멀리즘이 최대화된 구글 독스로 만들어진 무언가도 만들어지고, 제가 2022년에 수료한 부스트캠프 웹모바일에서 수료생들까지 지원자를 받아서 취준 스터디를 할 수 있는 온라인 공간을 마련해 주셔서 그 곳에서도 여러 리비전이 이루어 졌습니다.

구직활동은 처음에는 부스트캠프 동기이자, 학교 동문이었던 17학번 전자과 선배로부터 구직 공고들이 공지되는 오픈채팅방을 보면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유튜브에 있는 개발자 기술 면접에 관한 영상도 보고, ‘면접왕 이형’ 등의 일반적인 구직에 관련된 자기개발 채널들도 참 열심히 봤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술질문도 참 중요했지만, 일반적인 구직절차에 대한 이해도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다양하게 지원했습니다. 프론트엔드 개발자 포지션에도 지원했고, 소프트웨어 교육 기업의 교육 컨텐츠 PD로도 지원을 했었습니다. 그 때는, ‘개발따위 더이상 안하고싶어’ 하면서 삐지고 싶었던 기분이기도 했고, 미련 남기는 것 보다, 열심을 다해 시도해봤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기도 했거든요. 전화면접 이라는 것도 보고, 과제전형이라는 것도 하면서, 과제비 30만원도 받으면서, 우중충한 구직 생활 중에 나름의 활력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생활 패턴 만들기

구직활동, ‘취준’ 이라고도 하는 이 시기는, 참으로 유쾌 할 수 없는 시기입니다. 고3의 수험생활은, 명확한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명확하게 끝이 날 날짜도 있지요. 하지만 취준은 그렇지 않습니다. 각 기업마다 요구하는 것들이 다르기에 대학 입시처럼 한길을 걷고 어쩌고 저쩌고 할 수 가 없습니다. 그리고 몇명을 위한 자리를 열어줄지도 모르는 일이고, 도대체가 고3 입시와 비교해서 좋을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상대가 명확하지 않으면, 나라도 예측 가능하게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생활 패턴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참 감사하게도 본가에서 살 동안 고3인 여동생님 덕분에, 저도 식구들과 함께 밥을 먹고 살기 위해서는 고3의 스케줄에 맞춰야 했었고, 6시 30분 기상, 22시 30분 취침이라는 군대에서 했던 시간표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참 열심히, 꾸준히 했던 런닝도 전철을 타고 가서 온천천 산책로 까지 가서 열심히 뛰기도 했죠.

코딩테스트에 대해서도 다시 준비를 했습니다. 학부 저학년 때,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서 아무튼 마구잡이로 시작했던 PS공부는, 어찌보면 지적 유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시간 안에 풀어낸다라는 시험으로서의 당연한 요소를 무시하고, ‘내가 이 코드를 작성했어’ 하는 뿌듯함에, 온갖 현학적인 마인드셋이 장착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를 재구성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C/C++이라는 현학적인 습관이 묻어있던 언어를 버리고,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이것이 취업을 위한 코딩 테스트다 with python’이라는 책을 구매해서, 부스트캠프 취업 스터디원들에게 매일 두문제 풀이를 함께 하였습니다. 각각 필요에 맞는 문제들을 풀었지만 ‘하루에 두문제’라는 원칙으로 꾸준히 했던것이 중간 중간 코테 통과라는 작지 않은 성공경험들을 만들어줘서 버틸 수 있게 한 것 같습니다.

지금의 이야기

그토록 바라던 서울에 오게 되었습니다. 난생 처음 해보는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네요. 그동안은 ‘놀러’, 그리고 ‘체험하러’ 서울에 왔었지만, 이제는 ‘근로자’, 다시말해 ‘일꾼’으로 서울에 오게 되니, 공기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처음 해보는 이사였지만, 다행히 한양대 근처에 자취중인 고등학교 동창이 짐정리와 장보기 등을 정말 많이 챙겨줬고, 요 며칠간은 요리의 부스트캠프를 스스로 해보면서 이제 밥을 해먹는 진정한 사전적 의미의 ‘자취’를 시작했습니다.

서울에서 해먹고 있는 밥

이제 내일이 그토록 오기를 바라던 첫 출근일 이군요. 언젠가 써야지 써야지 하고 했던 지금까지의 작은 회고글을 마치겠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마워요